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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역사인물 중에 누가 청백리였을까요?

맹사성

맹사성

 

청백리로 이름이 높은 명재상 맹사성은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여러 벼슬을 지냈어요. 나중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는데, <태종실록>을 엮는 일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만들기도 했답니다.

맹사성은 욕심이 없고 청렴해서 청백리로 기록되었는데, 정승의 자리에 수십 년동안 있었지만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만큼 낡았고, 정승이란 높은 신분에도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해요.

맹사성의 좌의정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맹사성이 고향인 온양에 집안 어른들을 뵈러 올 때였어요. 인근 고을 두 원님이 맹사성을 맞이하기 위해서 길을 깨끗이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길을 웬 초라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거에요. 원님들은 못마땅해서 역졸을 시켜서 노인의 앞을 막았어요. 그러자 맹사성은 “온양 가는 맹고불(맹사성의 호)이가 소를 타고 간다고 알려라” 이렇게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고 해요.

 

맹사성

황희

황희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라면 황희 정승을 빼놓을 수가 없어요.

황희는 가장 놓은 벼슬인 영의정을 세종 때만 해도 무려 18년 동안 지냈답니다. 인품이 뛰어나고 청렴해서 왕의 신임과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어요.

황희는 87세 되던 해에 영의정의 자리에서 물러났어요. 그리고 3년 후 세상을 떠났지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이 문병을 와서는 깜짝 놀랐다고 해요. 영의정의 자리에 20년 가까이 있었던 황희 정승이 멍석 위에 누워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왕이 깜짝 놀라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하자 황희는 “늙은 사람이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면 그만입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고 해요.

황희는 청렴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업적도 남겼답니다. 농민들이 보다 넉넉하게 살 수 있도록 농사법을 개량했고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을 아껴서 노비 제도도 정비했어요.

 

황희

유성룡

유성룡

 

임진왜란 때 민심을 모으고 나라를 구했던 유성룡도 청백리였어요.

좌의정으로 있을 때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권율과 이순신 장군을 등용하자고 주장했어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되찾는 공을 세웠답니다.

유성룡은 10년 동안 정승 생활을 했지만 청렴하고 정직하여 언제나 가난했다고 해요. 한번은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유성룡을 시기하는 신하들이 유성룡이 갖고 있는 농토가 후한(後漢)의 권력자인 동탁(董卓)의 것보다 더 크다고 왕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유성룡은 너무 가난해서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손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할 정도였다고 해요.

 

유성룡

이원익

이원익

 

키가 너무 작아서 ‘키 작은 재상’으로 불렸던 이원익은 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청백리로 꼽혀요.

이원익은 1592년 이조판서 시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피난길을 인도했어요. 그리고 이듬해에는 유성룡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워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답니다. 1595년에는 우의정에, 1598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는데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고치는 등 백성들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어요.

이원익은 얼마나 청렴했던지, 온 천하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해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세자를 보내 조문을 하게 하고, 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올리게 했어요. 그런데 승지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집을 가서 보니 집은 두어 칸 짜리 띠집이었고, 그나마 비바람도 가릴 수 없는 낡은 집이었습니다” 하는 것이었어요. 인조는 “40여 년 동안 재상을 지내면서 초가삼간도 장만하지 못했더냐”라며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보내주었다고 해요.

 

이원익

이항복

이항복

 

"오성과 한음" 의 오성 이항복도 청백리였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이항복은 예조정랑, 병조판서, 영의정 등의 벼슬을 지냈어요. 예조정랑이었던 1589년에는 정여립의 난을 잘 수습해서 공신이 되었고, 도승지를 지냈던 임진왜란 때는 선조와 함께 피난을 가기도 했답니다. 그 공으로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어요. 1617년 당파 싸움이 일어나서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이항복은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북청으로 귀양을 가서 일생을 마쳤어요. 죽은 뒤에 다시 벼슬이 내려지고 청백리로 이름이 올랐답니다.

이항복이 영의정에 있을 때 일이었어요. 하루는 퇴궐하여 집에 돌아오는데, 지체 높은 영의정 대감의 행차이어서 백성 모두가 길을 비켰지요. 하인들 역시 기세 당당하게 “물러서거라”를 외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여인이 광주리를 이고 가다가 미처 길을 피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답니다. 성미가 급했던 하인들은 여인에게 “냉큼 물러서지 못할까?”하며 방망이를 휘둘렀어요. 이항복은 하인들에게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도록 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엄하게 꾸중을 했답니다. “너희가 한 가지라도 잘못하면 그 잘못은 내 잘못이 된다.” 그리고하인들에게 백성들 중 누구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게 다 관직에 있는 자신의 잘못이라며 하인들을 타일렀다고 해요.

 

이항복